내가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때 일이다. 수도권 지역의 한 검찰청에서 4개월간 시보로 근무를 하였는데 출근하는 길에 반드시 지나가게 되는 오거리 교차로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대에도 아무런 정체 없이 잘 빠지던 교차로였다. 그런데 가끔가다 심하게 정체가 되곤 하여 출근시간에 늦는 낭패를 겪었는데 몇 번 반복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인은 교차로에 설치된 신호등이었다. 당혹스럽게도 신호등을 켜지 않았을 때는 그렇게 소통이 잘 되던 교차로가 가끔 한 번씩 신호등을 작동시킬 때마다 여지없이 교통체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그 신호등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정확히 불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신호등 없이 서로 눈치껏 교차로로 진입하여 원활하게 빠져나가던 차량들이 신호등이 작동될 때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느라 다섯 갈래의 길에서 긴 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문제는 교통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 교차로의 통행량이 서로 눈치껏 지나가기에 딱 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신호등에 의해 순서대로 우선권을 주게 되면서 필요 없는 대기시간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교차로를 통과하는 시간 당 차량대수는 오히려 감소했던 것이다. 결국 교차로는 한가해지고 진입로들은 미어터지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신호등이 작동될 때마다 운전자들의 원성이 자자하였음에도 자꾸 신호등을 작동시키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기껏 설치해 놓고 한 번도 안 쓰면 예산 낭비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을 우려했을 것이라는 분석과 교행하던 차량 간에 사고가 나게 되면 설치되어 있는 신호등을 작동시키지 않은 당국에 책임이 일부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름대로 지지를 얻었었는데 결국 책임의 문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시스템과 관료주의

공식화된 시스템이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결과를 시스템에 돌리는 것이다. 즉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고 정해진 매뉴얼 또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했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물론 그 시스템 자체는 별다른 흠이 없다. 순서대로 공평하게 우선권을 주는 신호등처럼 숨김없이 투명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발생하던 시스템에 충실했다는 변명은 큰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 좋은 구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관료주의(Bureaucracy)라 부른다. 프랑스의 관료제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 관료주의는 대기업과 같은 대규모 조직이나 정부조직 등에서 자주 지적된다. 흔히 경직화된 계급제, 비인간적인 관계, 파벌주의, 형식주의 등이 그 요소로 거론되지만 그 기본적인 개념은 조직화․공식화된 관리권의 행사와 룰의 집행에 바탕을 두고 있다.

1백여 년 전 막스 웨버(Max Weber)가 가장 합리적인 조직구성방법이라고 불렀을 만큼 그 기본적인 덕목은 명쾌하다. 하지만 이른바 대기업병으로 잘 알려진 관료주의의 폐해는 이미 수없이 거론되어 왔고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감하고 있다. 조직화 및 공식화된 시스템이 야기하는 가장 큰 부작용이 바로 책임의 회피와 그에 따른 비효율성이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관료주의는 기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기술의 발달, 특히 IT 기술의 발달은 불행스럽게도 관료주의를 심화시키는데 한 몫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자동응답시스템, 즉 ARS(Automatic Response System)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번 ARS에 의한 멘트가 나오자마자 하는 일은 ‘상담원과 직접연결’ 번호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ARS를 싫어하는 이유는 ARS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와 #, 숫자들 사이를 헉헉 거리며 해매고 다녀도 이에 대해 전혀 미안함이 없다. 오히려 정해진 시간이 경과했다는 이유로 다음 기회에 해보라며 냉정하게 끊어버린다. 사용자의 고통은 시스템에 적응 못한 그들의 탓으로 돌려진다.

ARS는 다소 비유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약간 과장하면 IT 기술은 근거 없는 주관적 판단에 의한 일처리와 개인의 전횡 또는 균등하지 못한 대응을 막기 위하여 모든 프로세스를 최대한 세분화하고 각 단계에 적합한 알고리듬을 찾아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온 세상은 온갖 프로세스와 알고리듬을 만들어내는데 골몰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의 생산라인에서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과정에서도 정형화된 프로세스가 자리 잡고 있다. 정부와 같은 공공부문도 마찬가지이다. 내부 업무처리뿐만 아니라 대민 서비스도 규격화 내지 정형화로 매진하고 있다.

자본시장에서의 운영도 자동매매라는 프로세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심지어는 가장 순수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규정할 수 있는 남녀관계도 중매프로그램이라는 알고리듬이 적절한 짝을 찾아준다.

내가 일하고 있는 법원도 마찬가지이다. 판사에 의한 형벌의 부과라는 형사사법시스템에서도 범죄의 각종 인자와 양형요소의 분석을 통해 최대한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양형기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정도-창조적 유연성에서 파생된 ‘관료주의’

우리는 어느덧 공식화 내지 표준화된 프로세스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과거의 경험에 많은 부분 기인한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비합리성, 비공식성을 흔히 관행이라는 말로 부둥켜안고 왔다.

‘융통성’이라는 말이 만병통치적인 주요 덕목으로 꼽혀 왔고 ‘정도’는 세상물정 모르고 고집 센 미련퉁이들이 걷는 길로 치부되었다. 사실상 대접받는 최고의 능력은 재주 있는 변칙술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화 되면서 그러한 비정상의 병폐가 계속 드러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표준화된 프로세스의 도입이 강박적으로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절실한 후진적 현실이 남아 있음에도 창조적인 유연성이 요구되는 시대적 정신이 더해진 것이다. 아직도 사회전체의 합리적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는데 시대는 이미 시스템적 고정성을 파괴하는 창조적인 지식정보의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니 짝퉁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창조성과 자율성에 대한 부담은 합리적 시스템을 핑계 삼아 오히려 책임회피의 관료주의로 숨어든다. 시스템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유연성은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

지디넷 칼럼니스트인 김국현씨가 ‘웹 구조개혁의 제안’이라는 글에서 공인인증서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버린 폐쇄적인 웹 생태계를 지적한 바 있듯이 곳곳에는 시스템을 위한, 시스템에 의한, 시스템의 꽉 막힌 관료주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심플한 시스템, 엄격한 운영”이지, “복잡한 시스템, 허술한 운영”이 결코 아니다. 표준화된 시스템은 차량들이 눈치껏 빠져 나가기가 더 이상 어려워질 정도로 교통량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등장해야 한다.

복잡다단한 인증체계보다 신분위조에 대한 엄한 처벌과 신용도에 대한 엄격한 관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기술은 들어갈 절실한 필요가 없는 곳이면 되도록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결코 반기술적인 새로운 러다이트 운동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꾸 책임을 시스템으로 돌리려 하지 말고 책임 있는 운영과 이에 대한 믿음으로 제대로 해보자는 취지이다.

관료주의는 결코 시스템 자체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책임을 떠안거나 자유를 걸머질 용기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창조성도 살아나고 진정한 자유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 맨 처음에 언급한 그 교차로에서 얼마 멀지 않은 대로에 옆길로 진입하기 위한 좌회전 차선이 하나 있었다.

그 길로 통행하려는 차량들이 많아 보통 서너 번 정도의 신호를 받아야만 통과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참을 지나쳐 줄의 앞부분에 살짝 끼어드는 이른바 얌체 운전자들이 간혹 나타나곤 하였는데, 차선에서 정직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뜩이나 운전대 잡으면 급해지는 차에 억울함까지 더해졌으니 정신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고, 성질 급한 어느 동료도 매번 출근길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호소하곤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타나더니 그 길에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궁금해 하는 우리들에게 알려준 비결. “나도 씩씩하게 새치기하니까 스트레스가 팍 풀리데. 진작 그럴 걸!”

이런 용기는 부리지 말자.

http://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00000039163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