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협신문 2013. 10. 14.자 칼럼]

1년 전 동경에서 개최된 IT 컨퍼런스에 개인자격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세계 주요도시를 돌며 열리는 상당히 큰 규모의 행사였는데, 행사 마지막 날 한국과 일본의 IT 현황을 비교하는 세션이 열렸고 그 세션에 전길남 박사님과 함께 패널로 참여하게 됐다.

전길남 박사님은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원로로서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등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분과 함께 패널로 참여한 것도 영광이었지만 더 고무적이었던 건 그 자리가 IT 분야에서 앞서 나가는 한국의 경험과 비결을 듣는 자리였다는 점이다. 그런 자리는 대체로 일본으로부터 뭘 배우는 자리였지 일본에게 가르침을 주는 상황이었던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이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IT에 관한 것이었으니 흥분이 안 될 수 없었다.

한국의 인터넷과 IT의 역사, 인터넷 강국이 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분석되었고 전자정부뿐만 아니라 법원의 전자소송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러던 중 일본의 IT가 다시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한 전 박사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Moving quickly.”

최근 일본의 침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물론 아직 세계 최고의 선진국 중 하나지만 작금의 상황은 일본이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징후들이 뚜렷하다.
그 이유에 대한 여러 분석이 있지만 그날 나온 분석은 일본의 장점이 현재의 트렌드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일본의 장점은 신중함과 끈기다. 무엇을 하더라도 10년, 20년에 걸쳐 신중하게 접근하되 끈기있게 밀어붙여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 이것이 성급함과 변덕스러움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와 대조되는 일본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같은 장점이 지금의 IT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고 더 나아가 일본의 전반적인 침체와도 연결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회 전반의 변화를 끌어가고 있는 IT 산업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완성품이 아닌 베타 버전에 의한 실험적인 대응이 효율적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날에는 저만치 뒤처져 다시 따라잡기 힘든 상황에 처한다. 신중함과 끈기로 결국에는 훌륭한 것을 만들어내도 이미 상황은 다른 것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그 장점이 위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일본에게 필요한건 지금의 트렌드에 적응하는 것, “moving quickly”일 수밖에.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한달 전 일본변호사협회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일본의 전자소송 도입을 위한 특별 조사팀이었다. 약 두시간 동안 거의 100문항에 달하는 질문을 하고 갔다. 흥미롭게도 일본에서는 법원이 아닌 변호사회에서 전자소송의 도입을 주도하고 있었다. 법원은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인 듯했고 그나마 변호사회가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꼼꼼하게, 그러나 너무 과도하게 모든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고 답을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역시 빠른 시간 내에 도입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사실 우리 법원이 전자소송을 도입할 당시 너무 서두른다는 지적이 많았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우리 스타일대로 전격적으로 추진한 셈이다. 그 공과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평가될 것이지만 일단 우리는 트렌드를 따라 기선을 잡았고, 일본은 우리를 보며 고민을 하고 있다. 개인의 차원이든 조직의 차원이든 트렌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주체에게 필수적이고 법률가 역시 예외가 아닌 듯하다.

사실 법률가와 트렌드는 별로 친하지 않다. 직업상 대체로 신중할 수밖에 없고 변화에 민감하지 않으며 파격을 경계한다. 어찌보면 법률가가 트렌드에 민감한 것은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트렌드를 단지 유행이나 경향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흐름으로서의 트렌드를 정확히 간파해 내는 트렌드 워처(trend watcher)로서의 능력은 오히려 이 세상의 갈등을 해결하고 질서를 잡아가는 법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사람들이 법률가들에게 바라는 것, 사회가 법률가들에게 기대하는 것, 시대가 법률가들에게 요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bradlauster/15866646/,라이선스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