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없던 소수 의견이 보호됐던 스코키 사건의 의미

1977년 일단의 네오나치 그룹이 미국 시카고 근교의 스코키(Skokie) 시에서 퍼레이드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곧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는데 당시 스코키 시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특히 그들 중 약 20%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거나 생존자와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네오나치 그룹의 의도는 뻔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괜한 소동을 일으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일부러 스코키를 택하여 이슈화 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도발이자 모욕이었으므로 이에 대항하여 같은 날 데모를 계획하는 한편 그들을 상대로 행사중지가처분을 구하는 신청을 법원에 제출함으로써 사법부의 판단을 받게 되었다.

이 사안의 법률적 쟁점은 명확하였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서 보호되는 표현의 자유가 이 경우에도 보호되느냐 문제였다.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이 단체는 1920년에 설립된 비영리단체로서 개인의 자유에 관련된 이슈에 관한 대중 교육과 법적 소송, 입법 운동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근에도 인터넷에서의 음란물규제와 관련된 CDA 법안 등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가 네오나치 그룹의 변호에 나선 것도 바로 표현의 자유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ACLU를 대표한 변호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대인 사회로부터 온갖 비난과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심정적으로 도저히 네오나치 그룹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끝까지 사건을 맡아 소송을 수행하였고, 결국 유대인들의 평온과 양측의 충돌로 인한 위험성에 대한 고려보다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한 법원에 의하여 위 행사중지가처분 신청은 기각되었다. 그 후 네오나치 그룹은 그것만으로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계획한 날에 행진을 하지 않았고 결국 이 사안은 한바탕의 격렬한 논쟁만 남긴 채 마무리 되었다.

내가 이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TV에서 우연히 이 사건을 다룬 스코키란 영화를 보면서이다. 위 영화는 그 사건이 일어난 바로 다음해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위 사건을 그대로 극화한 것이다. 위 영화는 네오나치 그룹의 변호를 맡은 ACLU의 변호사를 중심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그의 갈등과 고뇌를 보여준다. 하도 오래 된지라 영화의 자세한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명확하게 남아있는 한 장면이 있다. 영화 끝 무렵 사건 관계자들을 기자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기자가 위 변호사에게 당신은 유대인인데도 어떻게 네오나치 그룹을 변호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무리 우리의 견해가 옳은 것이고 다수라고 하여도 이와 다른 소수의 견해를 가치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우리의 견해가 소수가 되었을 때 똑 같은 이유로 보호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영화를 지켜보면서 계속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왜 저토록 뻔한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인지, 네오나치 그룹의 생각과 의도는 이미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경험한 바 있고 만약 행진이 시작될 경우 흥분한 유대인들과 충돌이 일어나 무고한 희생이 생길 위험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이를 그대로 놔둬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대사 한마디를 듣는 순간 답답한 마음은 복잡한 마음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견해가 소수가 되었을 때’

사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였는가. 중국의 문화혁명이나 히틀러의 등장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당시는 결코 말도 안 되는 소수가 아니었다. 그러한 광풍은 다수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전혀 제어되지 않은 채 몰아쳤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 것이다.

줄기세포 사건이 남겼던 몇 가지 의미

우리는 최근 그야말로 극적인 상황을 경험했다. 한 과학자의 진실을 둘러싸고 갑자기 촉발된 논쟁은 엉뚱하게도 소수에 대한 다수의 공격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취재과정의 부당한 행위라는 계기가 있었긴 하지만 그때부터 순식간에 형성된 다수는 소수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근거가 무엇이었던 간에 다수라는 이름 하에 전혀 의문의 여지도 없이 소수의 의견을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누르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상황은 급격하게 반전된다. 불과 며칠 사이에 다수는 갑자기 소수로 전락해버렸고 그 소수는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다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 다수는 소수를 비난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이를 눌러버리고 있다. 그 변호사가 일갈했던 그 상황을 우리는 단 며칠 사이에 경험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애초에 그토록 순식간에 다수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 때문이었고, 다수에 의한 공격이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순식간에 몰아쳤던 것도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 때문이었고, 다시 다수가 순식간에 소수로 전락해 버린 것도 역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홍성욱 교수가 네트워크의 열림과 닫힘이라는 말로 정의하였던 네트워크의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우리는 며칠 사이에 경험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소위 인터넷 강국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가 겪었던 경험은 그 양과 강도에 있어서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게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험을 매번 그냥 한바탕 소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똥녀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다른 나라에서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가치판단이 수반되는 논쟁은 정치적, 사회적 분야뿐만 아니라 IT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기술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분야라고 하더라도 진실을 둘러싼 더 나아가 가치판단을 둘러싼 논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기술이라는 분야가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양식에 점점 더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사상의 변화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그 정도는 더욱더 심해진다. 게다가 기술을 둘러싼 경제적 이해와 국가적 이익이 중시되면서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여기에 정서적, 감정적 반응까지 겹치게 되면 그야말로 그 어느 분야보다 힘든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얼마 전 ZDNet에서는 MS의 한국시장에서의 철수라는 뉴스에 의하여 촉발되었던 논쟁을 지켜볼 수 있었다. 아는 게 없는지라 끼고 싶어도 끼지 못하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였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다행스러운 것은 소수의 당당한 의견표명과 이에 대한 이성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치열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슈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떤 사안이든지 그저 그렇게 대충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그에 대한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어야 한다. 그냥 지켜보기만 했지만 그 논쟁으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시각을 알 수 있었고 내가 무엇을 더 생각하여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번 사건으로 돌아와 우리가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원칙이다. 그것이 거창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간에 우리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원칙은 몇몇 훌륭한 사람에 의하여 그 때 그 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변호사의 외침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원칙에 의한 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게 된다. 스코키 사건에서 미국의 시스템이 가져간 결론이 경험과 상황이 다른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보호하여야 할 것은 그 의견이 아니라 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경구는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네트워크는 그러한 원칙을 세우는데 기여할 수도 있고 그 원칙을 깨뜨리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며칠 동안 경험하였던 혼란과 당혹감과 실망감을 충분히 보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http://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00000039143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