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무엇인지, 법률가의 임무가 무엇인지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유명한 말이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의 잔잔한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러분, 진실이 무엇인지 말하세요, 그러면 멋진 답을 드리리다.’ 얼마나 폼 나는 말인가. 갈고 닦은 실력으로 품위 있게 법을 적용해주는 법률가. 그러나 다들 눈치 채셨겠지만 그 감동이 좌절로 바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계획과 달리 사람들은 진실만을 들고 오지 않는다. 의도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흔히 하는 말로 피하고 싶은 것은 피하고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자신도 모르게 유리한 쪽으로만 애써 기억하고 필요한 것만 말하게 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이나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을 보신 분들은 무슨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사실을 확정한다는 것

상황이 이러니 법을 해석․적용하는 폼 나는 과정에 앞서 무엇이 사실인지 확정하는 고달픈 과정이 요구되고 오히려 여기에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이 집중되게 된다. 사실 법의 해석․적용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가 있다. 법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으며, 다소 복잡하지만 그 해석․적용의 룰도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법의 해석․적용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이루어지며, 임의적이고 불합리한 결과는 미리 마련된 프로세스에서 충분히 걸러진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legal mind와 legal process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서 온 오해의 결과이다.

그러나 사실을 확정하는 과정은 사정이 좀 다르다. 사실인정은 과거사실에 대한 복구이다. 이미 과거 속으로 흘러가버린, 그 어느 누구도 다시는 확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다시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며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진실 그 자체로 평가하자면 복구가 제대로 되었는지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복구하는 자도 확신할 수 없지만 지켜보는 자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더 큰 문제는 사실인정에는 특별히 정해진 규칙이 없다는 점이다. 사실인정은 인간이 만든 규범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선험적인 방식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진실의 발견이라는 목표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덤빌 수만은 없으니 재판이라는 진실발견을 위한 프로세스에 최소한의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는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사실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증거재판주의이다. 보통 당사자들이 재판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경우 제일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주장과 증거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라 해도 ‘거짓말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 해도 주장은 주장일 뿐이다. 주장은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 되는 경우에만 사실로 인정된다. 이 간단한 명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재판에서는 주장을 좀 더 큰 목소리로, 좀 더 감동적으로, 좀 더 반복해서 함으로써 사실로 인정해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안타깝긴 하지만 대부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헛수고이다.

결국 재판이라는 프로세스에서 제일 핵심적인 행위는 증거를 찾아 제시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이들이 간절히 찾아 해매는 성배이자 승리를 가져다 줄 보검이라 할 것인데, 문제는 현실에서 그나마 제시되는 대부분의 증거들이 ‘결정적이지 않은 증거’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증거는 완벽하고 결정적이지만 현실의 증거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반대의 증거와 그 신빙성을 흔드는 증거들을 동반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들 증거로부터 사실인정을 끌어냈다 하더라도 이는 또 다른 결론에 대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불안한 결론이다.

따라서 재판에 관여하는 자들의 가장 행복한 꿈은 ‘완벽한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의를 달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서 확실한 승리를 보장해 주는 회심의 카드를 찾고자 한다. 이러한 욕망은 그들이 들고 오는 증거를 판단해야 하는 재판관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답에 대한 불안감 없이 확실한 증거에 의해 사실을 인정할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 어디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

과학기술에 기대하는 완벽한 증거

과학기술의 발달은 ‘완벽한 증거방법’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예가 거짓말 탐지기이다. 거짓말 탐지기야 말로 진실발견에 목 말라하는 모든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발명이다. 그 많던 고민을 한 번에 날릴 결정적인 증거방법이 아닌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에 대한 법적 증거로서의 위상은 아직 미흡하다. 대법원은 거짓말 탐지기가 형사소송법상 증거로서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판단한 바 있다. 즉 “① 거짓말을 하면 반드시 일정한 심리상태의 변동이 일어나고, ② 그 심리상태의 변동은 반드시 일정한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며, ③ 그 생리적 반응에 의하여 피검사자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가 정확히 판정될 수 있다는 세 가지 전제요건이 충족되어야 사실적 관련성을 가진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한 다음, 마지막 ③번 요건에 대하여 “거짓말탐지기가 검사에 동의한 피검사자의 생리적 반응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장치이어야 하고, 질문사항의 작성과 검사의 기술 및 방법이 합리적이어야 하며 검사자가 탐지기의 측정내용을 객관성 있고 정확하게 판독할 능력을 갖춘 경우라야만 그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에 대하여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는 없게 되는데 현존하는 거짓말탐지기가 이처럼 엄격하기 그지없는 요건을 충족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위와 같은 요건은 비록 거짓말 탐지기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에 한정하지 않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증거조사방법을 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에 대한 일반적 기준을 제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 사실상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과학적 증거들은 그 증거자격에 대한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길고 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니 과학기술이 진실발견에 대한 결정적인 구세주가 되기는 쉽지 않다.

조작되는 ‘명백한 증거’

아이러니한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달로 ‘명백한 증거’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사정이다. 디지털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불가능하였던 것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기술에 대한 대중들의 접근성을 급격히 향상시켰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은 프로페셔널한 사진작가의 밥줄을 위협하는 사진의 대중화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는 ‘뽀샵’과 ‘합성’으로 일컬어지는 사진조작의 보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프로그램 용어를 잠시 빌려보면 이른바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였던 것에서 WYTIWYG(What You Thjnk is What You Get)이 가능해짐으로써 사진의 증거로서의 가치는 점차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문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서의 형식으로 된 증거를 서증이라 하는데 서증은 전통적으로 결정적인 증거로 작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는 그 문서가 ‘진정하게 성립되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문서가 위조되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일단 기술적인 측면이나 비용적인 측면에서 법관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을 속일만한 정교한 위조문서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고 특히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서가 위조될 가능성보다는 진정하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제하에 증명력의 판단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복제와 변형의 자유를 가져다 준 디지털기술로 인해 위조기술은 그 정교함을 더하면서도 저렴하고 쉬운 방법으로 발전되어 왔다. 결국 문서의 위조 가능성이 높아짐으로써 서증에 대한 증명력의 판단도 점점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의 보편화,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또 하나의 화두는 슬프게도 “조작”이다. 느낌을 조작하고, 보이는 것을 조작하고, 진실을 조작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생각마저 조작하는 것이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교묘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정보와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은 우리들의 눈을 가렸던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지만 조작이라는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장애를 만나 고전하고 있는 셈이다. 차라리 소박했던 과거가 좋은 시절이었을까.

 마지막으로 경험담 하나…

판사 : (간만에 결정적인 증거를 드디어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피고, 증거가 나 왔네요.
피고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판사 : (기분 좋게 설명해준다. 증거와 논리는 완벽하다. 모든 이가 수긍할 결론이다) 그 증거에 의하면 이러이러하니 결론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겠죠?^^
피고 : 음………….그렇지 않아요……
판사 : (당황하며) 네? 그게 왜 아니….
피고 : (단호하게) 아닌 건 아닌 거에요. 이유? 그런거 없어요. 아무튼 아니라니까! (그리고는 다시 자기 이야기만 한다)
판사 : ………….

아 험난한 현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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