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 아날로그에 호소하는 디지털 속 오류

“때는 2050년, 화성에 설치된 대한민국의 우주기지. 평온하던 기지가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로부터 습격을 받는다. 지상기지는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생존자들은 지하 벙커에 있는 사령실과 연락을 취한다. 사령실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구조요청을 하는 생존자의 다급한 모습이 비추어진다. 그러나 계속된 괴생명체의 공격 탓일까, 화면의 수신 상태가 좋지 않다. 영상은 자꾸 찌그러지거나 흔들리고 노이즈가 껴 점차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절규하는 생존자의 목소리도 잡음이 섞여 지직거리며 잘 들리지 않는다. 안타까움은 더해가지만 신호는 더욱더 노이즈가 심해지다 결국 끊긴다. 사령실은 공포와 한숨으로 가득찬다.”

아마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처럼 느껴질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SF영화에서 봐왔던 장면을 되살려 억지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니 당연한 느낌이다. 너무나 전형적인 장면이어서 안타까움은커녕 지루함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많은 영화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반복했는데, 여기에 옥에 티가 있다. 이글을 읽는 ZDNet 독자들이야 쉽게 알아챌 수 있겠지만 둔한 나로서는 누가 지적할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장면들이다.

답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화면이다. 직접 영화를 보면 간단한데 글로 표현하다 보니 이게 답이다 하고 강조한 셈이 됐지만, 어떠한 화면을 묘사한 건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만 2050년이면 통신이나 방송 등의 모든 신호는 디지털일 것이다(물론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 등장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묘사된 화면은 극히 아날로그적인 모습이다. 노이즈가 섞여 화면이 곡선으로 일그러지거나 검은 줄무늬로 가려지는 것은 아날로그 신호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니 제대로 바꾸면 위 화면은 자꾸 멈칫멈칫 하면서 이른바 깍두기 무늬로 깨지다가 멈추거나 사라지고 목소리도 잡음이 섞이는 것보다는 끊김을 반복하는 형태여야 한다.

에피소드 2 : 디지털의 일정함에서도 다름을 느끼는 아날로그의 오묘함

CD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른바 하이파이 오디오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디지털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지만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모든 신호가 0과 1로 바뀌어 저장되고 그대로 전송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록된 디지털 신호를 읽고 보내주기만 하면 전달되는 신호의 내용은 똑같기 때문에 CD 플레이어의 경우 기기에 따른 성능차이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도 훌륭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마케팅에도 인용되곤 하였다.

사실 매니아들 입장에서도 그 비싼 턴테이블과 바늘을 가려가면서 구입하고 온갖 묘수를 부리는데 투자하는 자금이 절약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많았다. 그러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것이겠지만 좀 과장되게 말하면 오디오 매니아들의 음에 대한 자세는 마치 구도자의 그것과 비슷하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하듯이 궁극적인 소리를 찾아 온갖 연구와 투자를 아끼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경건(?)하기까지 느껴진다. 이럴진대 그들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진리를 이제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고 대충하나 심혈을 기울이나 결과는 똑같다고 하니 마음이 허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CD에 대한 장밋빛 예상에 반기를 드는 의견들이 의외로 많았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CD가 나오기 전부터 이에 관한 논쟁으로 떠들썩했던 것이다. 그럼 결과는? CD가 상용화 된 후 mp3의 득세로 괄시를 받고 있는 지금까지 그 오랫동안 CD 플레이어를 사용해 본 결과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게 오디오를 좀 즐기는 사람들한테는 정설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기기마다 분명히 차이가 난다. 물론 아날로그기기보다는 덜하지만 CD 플레이어도 여전히 몇 만원부터 수 백 만원에 이르는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이 있고 기기에 따른 음의 재생도 분명히 차이가 있다.

물론 아직도 이에 대한 논란이 끝난 건 아니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차이가 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그럴 때마다 또 한바탕 시끄러워지지만 지금의 대세를 뒤집기에는 어려운 형편이다. 단순한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분야에 전문적인 기술 지식이 없는 필자는 이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다만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로 바꾸는 DA 컨버터 성능이 기기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라고 짐작되지만 DA 컨버터 기능이 빠진 CD 트랜스포트의 경우 기기마다 출력되는 디지털 신호를 똑같은 DA 컨버터에 연결해도 역시 다르게 들리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지터 처리 방법이 다르고 오류정정 회로에 차이가 있으니 성능도 차이가 난다는 설명도 있지만 성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음의 미묘한 느낌에 차이가 나는 건 정말 의외의 결과이다.

에피소드 3 : 여전히 존재할 아날로그 세계

일반인들이 법률가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판사가 법정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모습인데, 대한민국 법정에는 망치 비슷한 것도 없다. 가끔 당사자들끼리 목소리를 높이고 언쟁을 하느라 재판진행이 힘들 때에는 망치로 책상을 몇 번 두들겨서 그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책상을 두들기는 경우도 없거니와 선고할 때도 그냥 말로 조용히 할 뿐이다. 그 밖에도 여러 고정관념이 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법률공부는 법조문을 외우는 것이고, 법률가들은 법조문에 대하여 빠삭하게 알고 있으며, A면 B라는 식으로 법전에 의하여 답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현재 1개의 헌법과 총 1,163개의 법률이 있고 대통령령 등 모든 법령을 합치면 4,113개의 법령이 존재한다. 현행법령도 수시로 개정이 되며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으로 판단되어 효력을 잃는 법률규정도 계속 생긴다. 그 많은 법령 중에는 이름도 처음 듣는 것도 꽤 되고 법을 알고 있더라도 구체적인 규정까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암만 날고 기는 법률가라 하더라도 결국 그중 중요한 것들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해당하는 법령들만 파악하고 구체적인 업무 시에는 법전을 옆에 두고 수시로 확인해가며 일을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면 도대체 법률가들이 하는 일이 뭐냐고 반문한다. 어차피 법전 찾아보고 일을 할 거면 다른 사람들도 법전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따진다. 그래서 나오는 발상이 재판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것이다. 사실 관계를 데이터로 입력하면 이미 정리되어 있는 법령 데이터에 의해 처리되어 결과가 출력되는 시스템을 생각한다. 컴퓨터에 의해 처리되니 오류도 없고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을 염려도 없으니 신뢰 있는 시스템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잘못된 전제가 있으니, 세상일이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확정되고 가중치나 고려의 선후 관계 등으로 구분되는 디지털 데이터로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과 법령이 구체적 사안에 딱 떨어지는 답을 줄 수 있다는 전제이다. 만약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법률가들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위 전제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만족시키는 경우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판단을 위해서는 증거 등에 의해 형성된 심증에 의하여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법률규정을 문언적, 입법론적, 목적론적 등 다양한 측면에서 그 의미를 해석한 다음 이를 구체적 사안에 적용하는 프로세스를 거치는데 이 개개의 과정이 각각 수십 권의 책을 쓸 수 있는 만큼의 많은 논점과 이론들이 있는 어려운 논리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률가들이 오랫동안 교육받고 훈련받는 부분은 법조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프로세스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고 이게 그들의 밑천이다.

에필로그

다른 건 다 디지털이어도 인간의 감성에 절실하게 호소할 단계에서는 아날로그적 묘사가 최고라는 무의식적인 선택이나 의도된 오류(에피소드 1), 디지털 신호의 사소한 양적인 차이가 아날로그 감성의 결정적인 질적 차이로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감각기능의 오묘함(에피소드 2), 디지털 세계에서도 아날로그적 프로세스가 계속 작용될 수밖에 없는 세상사(에피소드 3)는 한마디로 이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아날로그 시스템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아무리 완벽한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어내고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고안해 내도 결국은 아날로그로의 변환을 거듭하여야 하며 수시로 아날로그 요소부터 영향을 받고 아날로그의 힘을 빌려야 한다.

결국 시스템이나 플랫폼의 핵심은 이러한 변환과 영향을 적절하게 처리해 줄 프로세스이다. 얼마만큼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현상을 해석하고 재배치하고 변환시킬 수 있는지, 얼마만큼 그 결과를 손실 없이 전달해 줄 수 있는지가 시스템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며 플랫폼의 운명을 결정지으리라 본다. 그러한 변환장치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탑재된 컨버터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사회의 구성 원리로 작동하는 사상이나 적절한 지식과 감성으로 무장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디지털 영역에서 아날로그 형 인간과 사고가 의의로 잘 먹힐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구식의 아날로그들이여, 힘을 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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