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TV가 없다. 몇 달 전에 TV를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지인들은 처음에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하겠는데 그 집 식구들처럼 TV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TV를 치우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것이다. 의아한 반응은 곧 눈 흘김으로 바뀐다. ‘독한 것들. 애들 공부시키려고 TV까지 없애다니’ 대충 이런 분위기다. 사실 TV가 사라지니 긍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그 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녁만 되면 TV를 일단 켜놓고 생활을 하였는데, 지금은 각자 책을 꺼내 들고 읽는, 정말 감동적인 모습이 연출된다. 애들이 느끼는 금단증상도 생각보다 별로 없는 것도 의외의 반응이다.

 

TV가 없어도 아쉽지 않은 이유

그러나 집에서 TV가 사라지게 된 것은 그러한 긍정적인 결과를 위해 요즘 한창 거론되는 ‘TV 안보기 운동’에 동참한 것이라기보다는, 좀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된 결과다. 우선,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보고 듣는 것’을 누구보다도 즐기던 우리 딸의 취미 중 하나가 친구들 모아놓고 그 전날 본 드라마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거였는데 드디어 다른 학부모로부터 항의가 들어왔다. 안 그러던 자기 딸까지 드라마 보여 달라고 조르니 제발 TV 좀 그만 보여주라는 취지였다. 안 그래도 코미디, 드라마, 영화 가릴 거 없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 역시 내 자식이 맞구나 라는 기쁨 아닌 기쁨을 넘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었는데, 다른 부모로부터 자기 애까지 망치겠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TV가 슬슬 맛이 가 상당한 수리비가 들어야 했던 것도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과감히’ TV를 없앨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별로 아쉬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던 아내는 어느덧 인터넷 사이트의 ‘다시보기’ 서비스로 편리한 시간에 드라마를 즐기고 있었고, 나도 점점 TV 앞에 앉아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 데다가 DVD나 VOD 서비스로 신작영화를 즐기고 인터넷으로 뉴스 따라잡기도 바빴으니 TV가 사라진다 해도 별로 달라질게 없었다. TV가 없어져도 모니터는 남아 있었으므로 우리 부부의 미디어 생활에는 별로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애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매체만 사라지는 셈이었으니(컴퓨터 사용은 되도록 시간 관리를 철저히 했었다) 그토록 과단성 있게 TV를 없앨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TV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TV라는 미디어 매체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아마 이는 우리 집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TV를 없애지 않았을 뿐이지 미디어의 중심이 TV 방송에서 다른 매체로 옮겨가고 있는 징후는 많은 분들이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90년대 초•중반까지 20~30%대를 유지하던 지상파 방송의 뉴스 시청률이 최근 한 자릿수까지 떨어지는 등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고 얼마 전 보도된 바 있다. 뉴스, 특히 8시 또는 9시의 메인뉴스는 지상파 방송의 핵심이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점차 속보성에서는 인터넷에 떨어지고, 심층보도에서는 케이블의 전문채널이나 신문에 떨어지니 이래저래 메인으로서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청률 50%가 넘는 대박 드라마가 간혹 등장하기도 하지만 드라마의 시청률도 예전만 하지 못한 게 요즘 실정이다.

 

방송사의 위기감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사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클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방송사들의 주요 수입원은 광고이다. 광고는 콘텐츠가 실린 방송 ‘신호’에 같이 실려 수신자에게 전달된다. 수신자들은 방송신호를 수신하여 콘텐츠를 시청할 때 그 사이에 끼어있는 광고를 시청하게 되는데, 방송의 공신력, 광대역성 그리고 영상과 소리가 결합된 매체의 특성상 그 마케팅 효과가 엄청났기 때문에 TV 광고는 엄청난 거액으로 거래될 수 있었고, 이는 방송사의 듬직한 수입원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방송에 대한 보호는 이러한 점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저작권법에서 방송은 ‘저작인접권(neighboring rights, related rights)’의 하나로 보호된다. 저작인접권은 저작물의 직접적인 창작자는 아니지만 저작물의 전달자로서 저작물의 가치를 증대시키는 실연자, 음반제작자 및 방송사업자에게 주어지는 저작권과 유사한 권리를 말한다. 1961년 로마협약에서 저작인접권에 대한 보호가 규정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위 협약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저작권법에서 저작인접권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저작인접권은 기존의 저작물에 일정한 가치를 더함으로써 보호되는 권리라는 점에서 2차적 저작물과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2차적 저작물은 기존의 저작물을 기초로 창작된 새로운 저작물이라는 점에서 저작권이 그대로 부여되지만, 저작인접권은 새로운 저작물로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증대에 대한 기여분으로 정책적으로 보호되는 것이므로 그 보호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현행 저작권법은 방송사업자에게 부여되는 저작인접권으로 ‘복제권’과 ‘동시중계방송권’만을 인정하고 있다. 복제권은 방송을 녹음, 녹화 등의 방법으로 복제할 권리를 말하고, 동시중계방송권은 동시중계, 즉 방송을 수신함과 동시에 재송신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유선방송이 지상파 방송을 받아 동시에 송신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두 가지 권리가 현재 인정되는 방송사업자의 권리인데, 이는 방송신호에 실린 ‘콘텐츠’의 보호가 아니라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신호’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인정되는 것이라 해석된다. 신호에 실린 ‘콘텐츠’가 저작물에 해당하는 경우 이는 따로 저작권으로 보호된다. 따라서 방송신호의 무단 복제는 저작물인 콘텐츠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뿐만 아니라 방송사업자의 방송신호에 대한 저작인접권으로서의 복제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방송사업자들은 저작권법에서 인정하는 위 권리들만으로는 방송사업자의 이익을 보호하기에 너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앞서 본 바와 같이 전통적인 방송사업의 수입원인 광고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떨어지면서 새로운 수익모델을 모색하게 되었고 나아가 이를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게 되면서 그 요구는 점점 거세졌다. 방송사업자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방송사업자에게 인정되는 권리의 확대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신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침해를 막을 수 있는 법 규정의 보완이다.

지난 5월초 스위스의 제네바에 위치하고 있는 WIPO(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서는 ‘방송사업자의 보호조약(Treaty on Protection of broadcasting organizations)’의 체결을 위한 14차 SCCR(저작권 및 저작인접권 상설위원회)이 개최되었다. 40여년이 지난 로마협약을 업그레이드 위한 시도인데 다른 저작인접권인 실연자와 음반 제작자의 권리에 대하여는 WPPT(WIPO 실연 음반조약)에 의하여 이미 새로운 조약이 체결된바 있다. 그러나 14차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방송사업자 보호조약은 10년 동안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기필코 최종안을 만들어보려는 의장단의 노력이 있었으나 미국, 일본 등의 선진국과 브라질, 칠레 등의 남미그룹, 인도, 이란 등의 아시아그룹의 심각한 의견대립으로 다시 새로운 상설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번 회의에서의 쟁점은 한두 개가 아니지만 크게 나누어 보면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방송사업자에게 어느 정도의 권리를 부여할 지와 새로운 형태의 침해를 어떻게 규정할 지로 정리된다. 방송사업자의 권리로 논의되는 것은 재전송권, 고정권, 복제권, 고정 후 전송권, 이용제공권이 있고 여기에 배포권, 공중전달권 등이 주장되는데, 이는 방송사업자 보호의 본질론과도 맞물려 있어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방송사업자의 권리보호확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그러한 권리는 방송신호의 보호를 넘어 신호에 실린 ‘콘텐츠’의 보호에 미치는 것이므로 그 한계를 넘은 것이라고 다툰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는 그러한 권리가 인정되어야만 방송사업자의 이익이 실질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방송신호를 이용한 마케팅, 예를 들어 전광판 방영을 통한 월드컵 거리응원이나 극장에서의 응원관람을 이용한 다른 기업의 마케팅으로부터 방송신호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한 예이다.

 

방송(Broadcasting)과 웹캐스팅(Webcasting)

게다가 더욱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한 신호이다. 소위 Webcasting내지 Simulcasting(웹케스팅 중에서 방송사업자가 자신의 방송을 인터넷상으로 동시에 전송하는 것에 한정된 용어이다)을 전통적인 방송과 똑같이 취급해서 보호해야 한다는 게 미국 등의 선진국 입장인데 반해, 남미그룹이나 인도 등의 아시아그룹은 웹캐스팅 등은 아직 명확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현실적인 규제가 어려우므로 이를 조약에 포함시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다툰다. 이와 함께 방송신호를 전통적인 방송의 형태인 유선방송 등으로 동시 중계하는 것 외에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하여 방송을 보내는 것을 방송사업자의 동시중계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은 의견대립이 있었다.

결국 최근의 논란은 미디어의 중심이 정보혁명으로 등장한 새로운 매체로 점차 무게중심이 이동되면서 전통적인 방송의 보호가 어떻게 새로 규정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라 할 것인데, 전통적인 사업모델만으로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 방송 사업이 새로운 수익모델의 창출과 새로운 미디어로의 확장을 통하여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이와 함께 새로운 형식의 침해로부터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힘겨운 싸움일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산업수준과 미디어 환경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국가 간의 다툼이기도 하다.

우리 애들에게 집에서 TV가 없어진 이유가 이렇게 거창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컴퓨터 한 대씩 달라고 할 게 뻔하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게 나을 듯싶다.

http://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00000039147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