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퓨전(fusion)의 시대이다. 퓨전은 몇몇 멋쟁이들의 세련된 취향의 범주를 넘어 문화의 키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퓨전 음악의 등장은 전통적인 장르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고, 퓨전 메뉴는 정통 메뉴의 인기를 넘어 레스토랑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패션이나 디자인 등의 영역은 말할 것도 없고 왼쪽 오른쪽으로 구분지울 수 없는 복합적인 색깔을 띠는 정치사상의 퓨전도 등장하고 있어, 이러다 보면 존 레논이 그렇게도 애잔하게 imagine 했던 무경계의 이상향이 실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성급한 희망을 갖기까지 한다.

이처럼 퓨전은 단순한 취향이나 감각의 차원을 넘어 문화와 사상의 새로운 조류로 승격되는데, 트렌드에 예민한 산업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마치 새로운 미지의 땅은 더 이상 없다는 듯이 오로지 퓨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얄팍한 잔재주로 평가절하 될 수도 있겠지만 퓨전이라는 트렌드가 새로운 기회와 돌파구를 마련해 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산업을 먹여 살리는 대중도 역시 이를 거부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누가 짬짜면의 등장을 환영하지 않겠는가(이것도 퓨전일까?). 퓨전은 모든 이에 대한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컨버전스, 산업의 중심에 서다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새로운 현상이 산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퓨전의 또 다른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뭔가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새로운 기회라는 점은 맞지만 모든 이에 대한 축복은 결코 아니다. 흥겨움이 아니라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것, 사람들은 이를 컨버전스(Convergence)라고 부른다.

컨버전스를 번역할 때 흔히 융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서로 다른 영역의 결합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융합이나 융해는 오히려 퓨전의 사전적 의미이고, 컨버전스의 사전적 의미는 그보다는 집중, 수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요즘은 LCD나 DLP 프로젝터에 밀려 점점 자리를 잃고 있지만 아직도 궁극의 지존이라 일컬어지는 삼관식 CRT 프로젝터를 사용해 본 사람은 컨버전스라는 단어에 아주 익숙할 것이다. Red, Green, Blue의 3개의 CRT에서 나오는 영상이 하나의 스크린에 정확하게 일치되도록 몇 시간을 붙들고 고생한 사람이라면 자다가도 컨버전스를 중얼거린다. 컨버전스가 되지 않은 영상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 광선이 정확히 같은 자리에 집중되어야만 만들고자 하는 갖가지 색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컨버전스에 성공한 자는 뿌듯한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지만 이를 이루지 못한 자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컨버전스가 모든 이에게 축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컨버전스의 치열한 전장, 방송과 통신

컨버전스는 이미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그것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든 간에 컨버전스를 둘러싼 승부는 이미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컨버전스는 디지털이 득세해버린 IT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로 대표되는 기술의 발전은 all-in-one으로 표현되는 카메라폰 등 복합, 다기능의 컴팩트한 복합기기를 가능하게 하였고, 더 나아가 가격 면에서나 성능 면에서나 개별기기의 한계를 넘어섬으로써 어느 제품이 주력이 되어 최후의 승자가 되느냐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치열한 다툼은 통신과 방송의 영역이다. 양방향으로 전달이 가능하다는 특성을 최고의 무기로 삼았던 통신업체들은 디지털 방송의 도입으로 방송망을 통한 상품의 주문 등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고 종합유선방송사업자들이 자신들의 망을 이용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 반면 방송사들은 브로드밴드의 보급 덕으로 webcasting, IP-TV라는 신종 미디어를 등에 업고 자신들이 해오던 서비스를 시도하는 통신업체들을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컨버전스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를 추진하는 동인은 산업의 다른 산업으로의 영역확장이다. 기회가 왔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예전에는 서로 굳건한 담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영토에서 맹주로서 군림하여 왔으나 이제 그 담이 없어졌다. 이는 넘어야 할 베를린의 장벽이 없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자신의 영역을 보호해줄 만리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기업의 운명을 건 한판이 시작된 것이다.

컨버전스의 승부를 가르게 되는 요인은 컨버전스의 과정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유추해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에 근거한 컨버전스는 기술의 우월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성능의 비교로서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 방향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느 한편이 좀 더 진화에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 있다. 즉 어느 기술이 주력이 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컨버전스는 대중의 수요와 선택에 의하여 승부가 나는 만큼 자신의 영역에서 확보하여 온 충성스러운 고객들의 수, 기꺼이 협조자가 될 수 있는 지원군의 세력,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략 등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사업적 전략에 근거한 방송과 통신의 컨버전스 싸움터에 생뚱맞게 끼어든 것이 있으니, 바로 ‘법’이다.

현재 방송과 통신을 규제하는 법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방송과 통신이 명확하게 구별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방송법으로 대표되는 방송관련 규제는 기본적으로 컨텐츠 및 여론형성에 대한 규제이다. 희소한 전파자원을 이용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그 실질적인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방송의 특성과 그에 따른 공익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사업자의 자격, 소유관계의 규제, 컨텐츠에 대한 심의 및 제재 등 모든 규제가 그런 방향에서 정립되고 시행된다. 이에 반하여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사업법 등으로 대표되는 통신관련법은 국민에 대한 통신서비스 제공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그 규제원리를 찾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이용자들에게 저렴하게 통신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제공할 수 있기 위하여 사업자의 기술적 능력이나 기타 산업정책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의 구비와 함께 요금규제 등의 정책을 규정하고 있으나 방송과는 달리 통신을 통해 전달되는 컨텐츠의 내용에는 중립적이다.

이처럼, 방송법과 통신관련법은 방송과 통신의 확연한 구별을 전제로 규제원리와 규제목표를 달리하며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구체적인 규제내용이 다르다. 따라서 방송에서 통신으로, 통신에서 방송으로 넘어오게 되는 경우 새로운 규제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단순히 방송사가 통신 업무를 추가로 수행 한다던가 통신회사가 방송의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서비스가 결합되어 새로운 유형의 서비스가 등장한 것이고 이는 기존의 규제원리의 차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방송법과 통신관련법 어느 것도 제대로 적용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두 법체계가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유형의 서비스를 규율하기 위하여 각각의 법을 수정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단순한 퓨전이 아닌 집중, 수렴으로서의 컨버전스로서의 방송 통신 융합에 대처하려면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규율하기 위한 통합된 규제체계의 신설이 좀 더 근본적이 해결책이다. 그러나 법은 기술의 변천만큼 탄력적이지 못하다. 기술의 변천은 특별한 절차 없이 새로운 연구와 사업추진에 따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법은 그렇지 않다. 특정 시점의 현상에 대한 분석과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적용할 법 원리를 찾아 낸 다음 그에 적합한 구체적인 규제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법의 변경은 기술의 변천에 대하여 결코 리니어하게 이루어질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법과 기술의 갭이 발생하게 되고, 법이 기술의 당연한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원망을 듣게 되는 원인이 있다.

게다가 더 하나가 추가가 되니, 법을 집행하는 규제기관의 문제이다. 법 원리의 변경과 법의 통합은 필연적으로 규제기관의 변경 및 통합을 가져온다. 그러니 방송위원회, 통신위원회, 정보통신부 등 각 규제기관의 운명과 권한을 둘러싼 다툼이 생기게 되고 이는 가뜩이나 탄력적이지 못한 법규제의 변경을 더욱더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규제기관의 대립이 단순한 부처이기주의로서가 아니라 방송과 통신에 있어 법규제의 목적 및 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행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과연 그 다툼이 법규제의 다툼인지 기관의 다툼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야 자신들의 운명을 건 한판의 승부이긴 하지만, 규제기관들 더 나아가 규제기관의 구성원들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들도 컨버전스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컨버전스는 매력적이다. 산업에는 새로운 기회를, 대중들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을, 사회에는 새로운 효용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덧 호기심은 긴장감으로 바뀐다. 컨버전스는 결코 퓨전이 될 수 없다. 퓨전의 감미로움과 산뜻함만을 즐기고자 하는 자는 함부로 컨버전스에 발을 들여 놔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걱정되는 것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우리는 이미 컨버전스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오늘도 한가로이 법을 논하던 게으른 소생은 문득 아무도 컨버전스의 광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혼자서 중얼거린다.

“난 퓨전이 좋은데…”

http://zdnet.co.kr/column/column_view.asp?artice_id=00000039142391